봄의 향기 가득한 수리산에 울려 퍼진 차이코프스키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은 내 영혼 속에서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 사랑 더 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어떻게든 당신을 슬프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말없이 희망도 없이 때로는 두려움으로, 때로는 질투로 괴로워하며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토록 진실하게 그토록 부드럽게 신이 당신에게 부여하신 섭리대로 다른 어느 누구라도 그들에 의해/ 당신이 사랑받아도 좋을 그만큼 - 예프게니 오네긴

차이코프스키는 처음 푸시킨의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을 보고 구성이 너무 산만해서 오페라를 쓰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밤새 연애편지를 쓰고 지우면서 고민하는 타치아니의 편지 대목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어 그의 유일한 대작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을 쓰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차이코프스키는 그 때 결혼을 앞두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타치아니처럼 편지를 보낸 밀류코바에게 바람둥이 주인공 '오네긴'처럼 행동하지는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지만 결국 결혼은 파경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한 우여곡절 중에서도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은 잘 완성이 되었고, 이 곡은 차이코프스키가 작곡가로 입지를 굳히는 밑거름이 되는 작품이 되었다.

봄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면, '아이러니'라는 말이 있지 않을까? 봄은 처녀의 사랑만큼이나 아이러니한 것이 아닐까? 사랑하고도 사랑하지 않고 그렇게 사랑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듯 돌아설 수 있는 사랑의 변덕만큼이나 아이러니한 것은 아닐까?

사당에서 지하철을 타면 25분 거리, 예술의 전당이 위치해 있는 서초동에서도 외곽순환로를 타면 15분이면 곧 도착하는 금정, 산본역에는 군포 예술문화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생각보다 서울의 강남, 서초에서 가깝게 올 수 있는 거리에, 가끔 조용히 클래식을 감상하기 딱 좋도록 매우 포근하게 안겨주는 도시 군포가 있었다.

이곳에 위치한 군포 프라임 필이 2016년 3월 새 봄을 맞이하는 클래식으로 차이코프스키를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협연자로 무대에 섰던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크 카자지안은 유감없이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통해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바이올리니스트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산과 같은 이 곡 또한 우여곡절이 많은 곡이었다. 당대 최고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레오폴트 아우어가 연주 불가능이라고 판정을 내려 방치되었던 그만큼 어려운 테크닉을 요구하는 곡이었다.

어쩌면, 차이코프스키의 여성적인 섬세함은, 첫 곡으로 선택된 유진 오네긴(예프게니 오네긴) 3막 1악장에 등장하는 폴로네이즈로 화사하게 꽃을 피웠다가, 바이올린 협주곡을 통해 아직은 추운 봄날의 시련을 경험하지만 결국 교향곡 4번을 통해 모든 것을 이겨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봄은 언제나 올 듯 오지 않고 오지 않는 것 같았다가도 어느새 발치에 다가서서 온 사방에 화사한 꽃의 향연을 뿌려놓고 있다.

타치아니의 사랑 고백을 처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콧대 높은 바람둥이 오네긴은 버스 떠나듯 타치아니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 이후에서야 후회하며 다시 찾아간다. 그리고는 어떻게든 유혹을 해보려고 하지만 타치아니는 정숙한 여인으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눈앞에 있는 뗏목이라도 잡았어야 할 것이었다. 헬기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바라지 말고.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에서 한 순간의 독주로 무대를 압도하는 하이크 카자지안의 기량은 대단한 것이었다. 마치 코스요리에서의 메인요리 같다. 그 앞의 폴로네이즈는 흥겨움으로 맛을 돋구어주는 에피타이저였다면 말이다. 충주 예술문화회관의 초청 공연에서, 이름도 낯선 이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한 소녀는 아르메니아어로 전하고 싶은 말을 번역해서 무대 뒤로 달려왔다는 일화가 있었다. 얼마나 감격했으면 그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어려운 언어를 직접 검색해서 찾아왔을 정도였을까? 이런 연주를 접하기가 얼마나 쉽지 않았으면 그랬던 것이었을까?

하지만, 요리는 스테이크만 좋아서는 안 된다. 샐러드도 디저트까지 만족스러워야 최고의 요리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심포니 4 번은 딱 군포 프라임 필의 음악적으로 완성된 수준을 잘 보여준 곡이 아니었을까?

차이코프스키는 그의 교향곡 4 번에서, 냉혹한 자신의 운명과 싸워 이길 것을 확신이라도 한 것처럼 행복하고 당당한 걸음걸이를 보여준다. 호른과 바순이 운명을 대변하듯 씨름을 하는 중간에, 클라리넷이 끼어들고 플릇도 한 목소리를 더해 관악기들의 대화가 초반에 이어진다. 그러다가 오보에가 노래하는 가운데 그들끼리의 대화는 러시아 춤곡의 리듬으로 발전해가고 3악장에서는 현악기들이 아예 모두 활을 내려놓고 피치카토로 응수한다. 이렇게 조금씩은 색다르고, 조금씩은 생각하지 못했던 음악들을 차이코프스키는 마음껏 보여주다가 마침내는 힘찬 박력으로 모든 악기가 하나의 움직임으로 통일된다. 지휘자의 손가락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반응해서 숨이 멎을 것처럼 현악기 주자들이 일사분란하게 활을 쳐드는 장관은, 오로지 오케스트라 연주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일 것이다. 현악기의 활에는 소나무의 송진을 사용한다. 그 송진 가루, 송홧가루 같은 꽃가루 연기가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사이에서 피어오른다. 봄이 되면 창밖에서부터 빨랫줄까지 내려앉는 봄의 아지랑이 같은 것이 코끝에 스쳐 앉는 음악의 정경이 아닐 수 없다.

교향곡, 심포니는 클래식의 황제와 같다고 누군가는 이야기했었다. 베토벤 이후로 평생에 아홉 곡을 넘기기가 힘들만큼 심포니는 클래식 음악의 정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클래식의 정수를 표현해 낼 수 있는 오케스트라라면 얼마나 많은 공연을 통해 많은 땀을 흘려왔을지. 그런 오케스트라가 상주해 있는 군포시민은 얼마나 음악적으로 복에 겨운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군포 프라임 필은 이미 다양한 테마의 클래식 공연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군포시 문화예술회관을 점심시간이면 아주 문화 살롱으로 만들려는 속셈이다.

4월 21일에는 '클래식, 영화를 만나다', 6월 16일 '클래식, 셰익스피어와 사랑에 빠지다', 9월 22일 '클래식, 전설을 노래하다', 11월 17일 '클래식, 미술관에 가다'와 같은 프로그램이 기획되어 있었다. 시간은 모두 11시, 그래서 이름도 '브런치 클래식'이었다. 장윤성 지휘자 이하의 단원들은, 소프라노 서활란, 기타 장승호, 뮤지컬 배우 송상은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을 초대해서 어린아이와 학부형들도 클래식 음악을 접하고 저변을 넓혀가겠다는 매우 아름다운 생각들을 가지고 계셨다.

3월이면 봄이라고 하기엔 수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군포시는 아직 춥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첫 사랑은 언제나 봄철 언덕에 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눈앞에 아련한 설렘으로 일어서고, 밤새 흰 편지지위에 쓰고 지우다 못해 그렇게 다 적어놓고도, 한숨 쉬며 결국 보내지 못해 서랍 속에 누렇게 바래진 타치아니의 연애편지가 아닐까? 봄은 언제나 그렇게 고달프고 애달프게 상처투성이로 찾아 왔지만 그래도 결국 추웠던 건 언제나 얼어붙었던 우리의 마음이었다.

유럽에서 영국은 언제나 작고 거친 나라 취급을 받았지만, 그들은 결국 헨델에게도 차이코프스키에게도 모든 작곡가들이 부러워했던 클래식 연주자, 오케스트라들로 인해 문화적 강국이 되었다. 언젠가 이곳 군포시에서도 군포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클래식의 향기를 피워내는 꽃으로 인해, 명실상부한 클래식의 도시로 자리매김할 날이 오게 되지 않을까? 꼭 그런 날이 오기를, 다음 연주회의 프로그램을 듣기 위해서 클래식의 도시 군포를 또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봄날의 차이코프스키를 찾아왔던 길고 긴 여정을 이제 마듬하고자 한다.

 

군포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97년 2월 창단된 군포 프라임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국내외 정상급 지휘자를 영입하고 우수한 기량과 열의를 갖춘 연주자들로 단원을 구성하여 교향악은 물론 오페라, 발레 등 극장음악 전문 오케스트라로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매년 4회 이상의 정기연주회와 국내외 주요 오페라 및 발레공연, 문화예술회관의 기획공연 등을 포함하여 연 100회 이상의 공연을 소화해 내는 중이다. 2000년 군포시문화예술회관의 상주 단체로 선정되어 지역 문화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는, 군포 프라임필은 2009년부터 시행된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사업의 롤 모델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금까지 89회의 정기연주회를 비롯한 1,900여회의 공연을 통해 다양한 음악적 색채를 구현하는 매력적인 오케스트라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국내 교향악단 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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