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대문안에 유일한 600년 영당

   
 
   
 
   
 
   
 

 서울시는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우리 전통과 가족문화를 돌아보게 하며, 옛 것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위해 ‘남산골 우리종가 이야기’를 매월 개최하고 있다. 이번 5월 행사는 금년 ②번째로 개최되는 종가이야기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충(忠)과 효(孝)라는 민족국가의 정서적 근간을 굳건히 간직하고 있는 종가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의 둘째아들 인제공 이종학(麟齋公 李種學1361~1392)의 22대손인 이세준(李世濬70)씨와 종부 이선호(李善鎬68)씨가 출연하여 관람객들에게 종가의 전통과 문화, 목은 선생이 차지하는 역사적 가치와 의의를 소개했다.

 

  다후소영(茶後小詠) 小 甁 汲 泉 水 (소병급천수) 작은 병에 샘물을 길어다가 破 烹 露 芽(파당팽노아) 깨진 솥에 노아차를 달이는데 耳 根 頓 淸 淨(이근돈청정) 문득 귀가 밝아지더니 鼻 觀 通 紫 霞(비관통자하) 코가 열려서 신령스런 향기를 맡네. 俄 然 眼 消(아연안예소) 어느덧 눈에 가리운 편견도 사라지고 外 境 無 纖 瑕(외경무섬하) 몸 밖의 티끌도 하나 보이지 않네. 舌 辨 喉 下 之(설변후하지) 차를 혀로 맛본 뒤 목으로 내리니 肌 骨 正 不 頗(기골정불파) 살과 뼈가 절로 바로 된다네.

 靈 台 方 寸 地(영대방촌지) 가슴 속 작은 마음자리는 皎 皎 思 無 邪(교교사무사) 밝고 맑아 생각에 사특함이 없어라. 何 暇 及 天 下(하가급천하) 그 어느 겨를에 천하를 다스릴 수 있으라 君 子 當 正 家 (군자당정가) 군자는 집안부터 바르게 하는 법 아니던가 고려말의 선비차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의 차시 다후소영(茶後小詠)이다.

 차를 끓여 마시는 일은 선비가 수양을 쌓는 길과 같다며 유학사상에 다도를 접목했던 목은선생의 종가는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91번지에 있다. 비록 맏아들로 이어온 후손이 살고 있지는 않지만 살림집은 종친회 사무실로 사용했고, 영정을 모신 영당에서는 양력 5월5일과 10월10일에 선생을 추모하는 차례를 모시고 있었다.

  600년 지켜온 기적의 영당 서울 조계사 앞 오른편 길을 따라 200m 거리에 국세청 현대 건물과는 대비되는 홍살문(紅門)이 우뚝이 서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도심 속 섬 같은 작은 공원이 빌딩 숲에 가려져 있지만 공원 때문에 더욱 넓어 보이는 200여 평 대지에 조촐한 단층칠의 영당이 낮설어 보인다.

 성리학 연구와 정치적 실현에 큰 업적을 남기며 끝까지 고려왕조에 지조를 지킨 선생의 영당이 서울 사대문 안 이씨 왕가 바로 이웃동네에 있다는 사실은 매우 뜻밖이었다. 지난 해 5월5일 목은 선생의 봄 차례에 참석을 했다. 이날 정오, 전국에서 모인 500여명의 후손들이 정성껏 마련한 제물을 차려두고 600여 년 전 아득한 조상을 기리는 풍경은 우리 문화의 진면목을 보는 듯 했다.

 차례는 영정을 가렸던 휘장이 걷어지면서 시작됐다. 하얀 수염에 은근한 미소로 후손들을 반기는 인자한 모습의 고려인, 그래서 고려 관복인 홍포(紅袍)와 머리에는 날개가 아래로 늘어진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허리에는 각띠를 착용한 채목화를 신은 반신상의 영정이 신비롭게 나타났다. 오른편에는 그의 제자인 양촌 권근이 쓴 화상찬도 있다. 이 영정은 선생이 세상을 떠난 5년 뒤 1404년에 그려진 것으로 국가 보물로 지정돼 있다.

  22대 600년 한곳에 머물다. 포은정몽주, 야은 길재 등과 함께 고려 3은으로 칭송받는 목은 이색선생은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할 정도로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다. 그는 26살에 과거에 합격해 성균관 대사성으로 새로운 학풍인 성리학을 도입하는 신흥사대부의 선두에 있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 두 왕권의 교체시기에 명리보다는 의와 뜻을 따르게 된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곧은 절개 때문에 목은선생의 두 아들 종덕과 종학은 피살 당했고 그도 괴나리봇짐에 차와 차기를 챙겨 방량생활을 하다 여주 강가에서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친다. 큰아들 후손들은 영정이 있는 서울에서 벼슬을 살았지만 국난으로 고향인 한산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한산에서도 맏집 종가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후손들 중에 둘째아들 인제군 이종학(麟齋公 李種學1361-1392)의 22대손인 이세준(李世濬70, 고양향교전의)씨와 종부 이선호(李善鎬68)씨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종택에서 만날 수 있었다. 수백 년 살았던 고택은 세월의 무게에 쓸어지고 그 자리에 번듯한 2층 양옥을 지었다.

 그러나 살림살이 구조는 옛 모습 그대로 이다. 집 뒤뜰에 단을 높인 장독대 옆에는 볏짚으로 만든 토지신 제단이 있고, 고방에는 조왕신, 마루에는 성주신이 지키고 있었다. 조상을 모신사당과 재실도 전통한옥으로 지어 종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서울서 대학을 나온 종손은 지금껏 600년 전 터 잡은 선조의 땅을 떠나보지 않았다고 한다. 조상의 얼이 베인 땅에서 부모님이 그렇게 살아 왔듯이 자신도 조상의 땅을 지킬 것이고 외아들 이준석(李準)과 손자도 이 땅을 그렇게 지켜 나갈 것이라며 3대가 한집에서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내림음식: 배조청 이 댁의 내림음식은 배로 만든 조청이다. 과수원을 운영하는 종가는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배를 무쇠 솥에 고운 다음 건지는 건져내고 황설탕을 넣어 걸쭉한 조청이 되도록 졸인다. 배조청의 활용은 다양하다. 식빵에 잼처럼 발라먹기도 하고, 멸치 볶음도 배조청으로 양념한다.

 명태 찜에도 배 조청이 들어가면 부드럽다. 따끈따끈한 가래떡을 찍어 먹으면 어렸을 적 할머니 생각이 절로 나는 추억의 음식이 된다. 그런데 종가에서는 조청이 아니라 배 쨈이라 부른다. 젊은 주부들이 조청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북어 찜 만드는 법 ① 북어는 머리를 떼고 방망이로 대강 두들겨 물에 담갔다가 건져 펴서 뼈를 발라내고 5~6㎝정도의 크기로 토막을 낸다. ② 파, 생강, 마늘을 곱게 채친다. ③ 간장과 배조청, 깨소금, 후춧가루를 함께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냄비에 켜켜로 북어와 양념장을 얹고 다시 파채, 생강채, 마늘채를 얹어 천천히 중불에서 끓인다. 냄비 가장자리에 물⅓컵 정도를 두른다. ④ 북어가 잘 무르고 국물이 없어지면 실고추와 채친 파를 위에 얹고 잠시 뜸을 들여그릇에 담는다.

  다식 재료 차 다식 가루차 2큰술 푸른콩가루 1컵 배조청 4큰술 소금 조금. 송화다식 송화가루 1컵 배초청 3큰술 흑임자 다식 흑임자 1컵 꿀 1과2분1큰술소금 조금 백다식 거피한 팥고물 1컵 배조청1숟갈 대추다식 대추를 곱게 채썰어 그대로 다식판에 박으면 된다. 대추는 몸에 당분이 있어 꿀이나 다른 첨가물이 필요 없다.위의 재료들을 모두 반죽하여 다식판의 모양만큼 조금씩 떼서 랩지를 깐 다식판에 찍어 낸다.

 <사진설명>

  하얀 수염에 은근한 미소로 후손들을 반기는 인자한 모습의 이색선생, 고려 관복인 홍포와 머리에는 날개가 아래로 늘어진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허리에는 각띠를 착용한 채 목화를 신은 반신상의 영정이 신비롭다.

 이영정은 국가 보물로 지정돼 있다. 생활의 편리함 때문에 집은 현대식이나 살림살이 구조는 여뉘종가와 다를바 없다. 집 뒤뜰에 단을 높인 장독대 옆에는 볏짚으로 만든 토지신이 있어 추수가 끝나면 벼씨를 갈아 넣고 시루떡으로고사를 지낸다.

 가을 시제를 강당처럼 넓은 재실에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지낸다. 종손과 문중 분들이 함께 모시는 조상의 위채는 35위나 된다. 이중에는 종손의 21대 선조의 장인 장모 위패가지 있어 조선 초기에는 외손도 외갓집 제사를 받들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전한다.

  3대가 한자리에 모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배 밭을 관리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제사를 모시며 안살림을 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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