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기도 전에 나는 부리나케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하늘은 온통 구정물을 뿌려 놓은 듯하고 공기가 습한 것이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았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나는 걱정이 앞섰다.
‘내일이 설인데 눈이 많이 왔다가는 버스가 끊길 테고, 그럼 고향에 다녀오는 일은 어림도 없겠는 걸!’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대합실로 들어갔다.
나름대로 꽤 일찍 왔다고 생각했지만 대합실은 벌써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서서 시장바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시끌벅적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매표창구를 보니 다행히 802번 매표창구에 차량 한 대를 더 추가로 운행한다는 공지가 붙어 있었다.
‘됐다! 올해는 고향에 가서 명절을 보낼 수 있겠다.’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제 줄을 서기 위해 뒤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타오현으로 가는 표 한 장만 사주시오…….”
누군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불쌍하다는 생각에 나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내 옆에 있는 긴 의자에 한 노인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아 방금 그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옷을 그다지 낡지 않았지만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고 얼굴이 매우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병까지 있어 보였지만 그래도 차표 살 돈을 손에 쥐고 있는 걸 보면 분명 거지는 아니었다.
‘어쨌든 줄을 설 힘이 없는 모양이군!’이라고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간 순간에야 나는 그가 맹인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나는 속으로 분개하기 시작했다. 우선 터미널에 이런 사람을 도울만한 시스템조차 갖추어 놓지 않았다는 것에 화가 났으며 대합실에 서 있는 사람 중 어느 하나 이 불쌍한 노인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에 더욱 화가 났다.
그러니 내가 이 노인을 도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타오현 행 버스의 매표창구가 어디에 있는지 눈으로 더듬어 보았다. 다행히도 802번 옆인 803번 매표창구였다. 게다가 그곳에는 ‘차량 2대 추가운행’이라는 공지가 붙어 있으니 여간 기쁘지 않았다.
나는 줄을 서기 위해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줄의 끝에 서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어느 줄에 먼저 서야지? 먼저 저 노인의 표를 끊자니 십중팔구 내 표를 못 살 테고 내 표를 먼저 사자니 저 노인의 표가 확실치 않고. 이를 어쩌지?’
나는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에구,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군, 만들어!’
하지만 나는 곧 이런 생각을 나무랐다.
‘비록 내가 저 노인에게 직접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스스로 책임감을 느꼈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아까 다른 사람들이 너무 한다고 욕해놓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게 말이 돼?’
그러나 어느 줄에 먼저 서냐 하는 문제는 빨리 양단간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줄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빨리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두 장 다 사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802번 매표창구에 줄을 섰다. 순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재빨리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타오현 행은 2대 추가됐지만 우리 고향으로 가는 차는 겨우 1대밖에 추가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내 표를 먼저 사는 것이 당연하지.’
나는 이렇게 하면 설령 노인의 표를 사지 못한다 해도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으니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고 실질적인 행동을 취했잖아!’이런 생각을 하며 줄을 서 있는데 왠지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마치 노인은 맹인이 아니며 바로 내 뒤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내 표를 산 뒤에 나는 다시 노인의 표를 사기 위해 줄을 바꿔 섰다. 이미 내 욕구를 채운 뒤에 다시 타의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한다는 것에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면서...물론 나는 줄의 맨 끝에 섰다. 내 앞에는 덩치가 큰 청년이 서 있었는데, 머리를 잔뜩 세우고 딱 붙은 바지에 뒤 굽까지 번쩍이는 구두를 신고서 오른 쪽 발로 발장단을 치고 있었다.
앞모습을 보지 않아도 나는 그에 대한 반감이 앞섰다. 나는 왠지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신뢰감이 생기질 않는다. 우리 연배에 비해 개성 강하고 자기 생각이 분명한 건 좋으나 도덕관념이나 예의,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등은 우리에 비해 형편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그 청년이 다소곳이 맨 뒷줄에 서 있는 것조차 신기할 정도였다.
‘아마도 표를 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렇게 얌전히 있는 거겠지. 만약 표를 못살 지경이라면 분명 맨 앞으로 달려가 날름 새치기를 할 걸.’
그 때 줄의 왼쪽에 서 있는 젊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줄을 서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애매한 자세로 서서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고 아무런 일 없이 서 있는 사람처럼 가장하는 듯도 보였다.
나는 그녀도 기회를 봐서 새치기하려는 사람일 거라고 단정 지었다. 물론 내 판단이 틀렸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그녀의 곁에는 네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서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아이인 듯했다.
청년과 여자, 이 두 사람 뒤에 서 있자니 나는 또 다시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긴박한 상황이 벌어질 경우 분명 두 사람이 무슨 일인가를 저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줄을 따라 조금씩 앞으로 이동했다.
결국은 염려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청년과 여자,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남았을 때 표는 마지막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표는 내 순서까지 오지 않았다.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노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내 앞에 있던 두 사람은 바로 내가 예상했던 대로 결국은 표 때문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매표창구에 있는 직원이 이제 표가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함과 동시에 젊은 여자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가 매표창구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청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표가 이미 여자의 손에 넘어가고 난 뒤였다. 청년이 매표창구 안에 있던 직원에게 따지려는 찰나 매표창구의 창문이 드르륵하고 닫히며 ‘매진’이라는 안내판이 내걸렸다.
청년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여자를 가로막고 섰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험한 말로 표를 내놓지 않으면 좋게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윽박질렀다.
비록 내가 청년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도리를 따지자면 여자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 한편 부인은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파르르 떨며 한 마디 대꾸도 없이 욕을 듣고 있었다.
아마 자기가 생각해도 옳은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잘못을 수긍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왠지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녀의 어린 딸이 엄마 품에 꼭 매달려 겁에 질려 우는 모습을 보니 더욱더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사람을 윽박지르는 청년에게는 더욱 강한 반감이 들었다.
‘아무리 네가 옳다고 해도 그렇지. 여자와 아이 앞에서 그러면 남자가 아니야!’
여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입술을 깨물고는 뭐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청년은 더욱 화를 내며 무섭게 여자를 윽박지르는가 싶더니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이런, 큰일 났다.’
바로 그때 어린 아이가 갑자기 용감하게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청년을 가로막았다. 구슬 같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조그만 입을 빌려 말했다.
“아저씨, 제발 우리 엄마를 때리지 마세요!”
아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청년의 태도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청년은 약간 놀란 듯한 얼굴로 볼이 통통한 여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이어 놀랍게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저씬…… 사람 안 때려.”
말을 마친 청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돌리고는 말없이 서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내심 깜짝 놀랐다.
‘난폭한 줄 알았던 네 마음속에도 따뜻한 감정이 숨 쉬고 있었군 그래!’
잠시 후 청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며 공손하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아깐 제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대꾸하는 대신 아이에게 말했다.
“착하지, 아저씨한테 ‘고맙습니다.’해.”
“고맙습니다, 아저씨.”
아이의 눈에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청년은 머쓱한 웃음을 짓더니 주머니에서 차표를 꺼내어 여자에게 내밀었다.
나는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에 의아했다.
여자 역시 의아한 얼굴로 청년과 표를 번갈아보며 눈만 깜빡댔다.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청년이 입을 열었다.
“원래는 차표 한 장은 벌써 샀어요. 하지만 이건 원래 저를 위해 산 표가 아니에요. 두 번째 표는 저를 위해 사려던 거지만 당신이 사고 말았죠. 하지만 괜찮아요. 당신은 아이도 있고 하니 아무래도 이 표는 당신이 가지세요. 전 안 가기로 했어요. 대신 부탁이 한 가지 있어요. 저 대신 어떤 사람 좀 돌봐주세요.”
“누구요?” 여자가 물었다.
그가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는 맹인 노인이요.”
사태가 여기까지 진전됐을 때 나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내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가 앗! 하는 소리와 함께 표를 다시 청년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신기하네! 이 표도 저 노인을 위해 산거예요!”
“예? 저 사람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요…….”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서로 마주보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순간 나는 완전한 바보 영감 같기도 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담임선생님 앞에 불려나온 학생 마냥 그들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머릿속이 웅웅대고 목이 답답해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
그 때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제 목적지는 타오현이 아니에요. 제 차표는 802번 창구에서 샀어야 하는데 저 노인이 너무 불쌍해서, 노인 표부터 사려던 거였어요. 근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당신 앞에 새치기를 한 거예요. 미안해요. 시간도 다 됐으니 어서 노인과 함께 차에 오르세요!”
청년은 자기 호주머니에서 차표 값을 꺼내어 여자의 손에 올려놓고 허리를 숙여 아이의 볼에 뽀뽀를 하고 곧장 뒤돌아서서 노인에게 향했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어지러운 발걸음을 옮겨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내 차표를 꺼내어 주며 말했다.
“이 표를 사려고 했죠? 전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가게 됐어요. 대신 사세요.”
여자는 기뻐서 함빡 웃음을 지으며 돈을 꺼내주며 말했다.
“진짜 운이 좋네요!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나는 차표를 건네준 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여전히 붐비는 대합실을 빠져나왔다.
바깥은 이미 은백색의 세계로 변했다. 조용한 거리에 흰 눈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하얀 눈 위에 경쾌한 발자국을 남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남을 도울 때처럼 행복한 경우는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조금이나마 나의 역할을 했다는, 그래서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었다는 느낌을 남겨주기 때문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것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고개를 돌린 순간 그 사람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어려움에 빠져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천만 명의 마음을 울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중에서

저작권자 © 컨슈머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