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백 살 안팎의 편백(扁柏)나무 삼(杉)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선 원시림을 오른다. 침엽수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가 우리 폐부를 맑게 씻어주는 듯하다. 우리 일행 외에는 아무도 없다. 제법 경사가 있는 등산로 초입 분위기가 1년 전 울릉도 성산봉 오를 때와 비슷하다. 단지 새들의 웃음소리가 없는 게 그때와 다르다. 그 웃음을 우리 친구들이 대신한다. 등산하느라 힘든 가운데서도 연신 웃음꽃이 만발한다. 마치 아이들 소풍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천상병 시인이 인생은 소풍이라 한 말이 떠오른다. 잠시 이 세상에 놀러 온 게 우리들의 삶이라는 말일 게다.

 10월 초 연휴를 맞아 친구들과 대마도(對馬島, 쓰시마) 여행을 다녀왔다. 비록 2박3일 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울릉도의 10배, 제주도의 2/3 면적에 3만5천 명이 살고 있다. 남북 길이는 82km이고 섬의 89%는 산으로 이뤄져있다. 부산까지 약 50km인 반면, 일본 본토 후쿠오카까지는 150km가 떨어져있다. 여기를 가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원조 물개 고 조오련 선수가 수영으로 횡단한 대한해협을 건너야 한다.

 두 시간이 채 안 걸려 아리아케(有明山, 해발 558m)에 올랐다. 우리 일행을 환영하는 듯 정상에 무성한 갈대가 넘실넘실 춤을 춘다. 대마도 주변 섬들이 우거진 나무로 인해 에메랄드빛을 띤 채 바다에 둥둥 떠 있다. 대마도 주변에만 109개의 섬이 있다. 이중 5개만 유인도이고, 나머지는 무인도란다.

 이제까지 살면서 대마도에 대해서 많이 들었지만 역시 한 번 가서 직접 보니 그간의 단편적인 지식을 하나의 온전한 구슬로 잘 꿸 수 있었다. 이래서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고 하는가 보다. 부산에서 배로 두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이즈하라항 시내 옛길에는 조선과 일본국 간 교린(交隣)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중 조선통신사의 발자취가 단연 인상 깊었다. 대마도는 조선통신사 노정(路程)의 거점이었다. 조선통신사는 일본 막부의 요청으로 조선국왕에 의해 파견된 평화와 선린우호(善隣友好)를 위한 국가사절이었다. 당대 최고 관료와 학자, 문인을 비롯하여 악대(樂隊), 소동(小童), 무인(武人), 통역관 등 약 300~5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장대한 행렬은 두루마리와 병풍으로 그려져 현재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 잘 보존되어 있었다. 통신사 일행이 머물렀던 숙소에는 수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모여들어 학문과 예술의 교류의 장이 되었다. 이외에도 조선통신사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인형도 남아있어 당시의 자취를 엿볼 수 있었다.

 이러한 사절단을 맞이하는데 있어 대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아메노모리호슈(雨森芳洲, 1668~1755)였다. ‘서로 미워하지 말고 싸우지 말며, 진실을 가지고 교류하는 것’이 ‘성신(誠信)교류’임을 강조한 호슈의 외교철학은 현대에 와서 더욱 빛을 발하는 보편적인 이념이 되었다. 조선통신사는 상호 신의(信義)를 바탕으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대등한 외교실천전략이었다. 일본과의 관계과 매끄럽지 못한 오늘날 조선통신사가 상징하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산해 시내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다녔다. 일본 사람보다 한국 사람이 더 많아 보였다. 지리적으로 일본보다 한국이 더 가까우니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오고 이들이 대마도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상점 앞에는 ‘죄송합니다만, 한국 관광객분은 여기에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라는 표지가 붙어있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이곳 식당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하고, 술 취해 행패를 부려 그렇게 됐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서로 미워하지 말고 싸우지 말라고 했던 그 옛날 호슈의 정신이 오늘날 실종된 것 같아 여행 내내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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