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를 울리는 적폐가 청산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그것은 소비자 혼자서는 적폐를 청산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즉, 자본 중심으로 설계된 자유시장 경제 체제 아래에서 소비자는 약자인 을(乙)이고 취약계층일 수밖에 없다. 만일 소비자가 약자가 아니라 힘이 있었다면 정경유착으로 인한 폐해나 소비자 문제의 발생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정경유착, 정언유착이라는 단어는 흔히 들을 수 있지만, 정소(政消)유착이나 정민(政民)유착이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 없다. 그 이유는, 약자인 취약계층과 권력이 유착되는 현상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15년 전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 즉, 소비자는 이제 취약계층이 아니고 보호 대상도 아니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산업사회가 시작되던 40년 전에 선배 학자, 운동가, 관료, 정치인이 합심하여 소비자보호법을 제정하였다. 1980년에 제정된 소비자보호법은 이후 20여 년간 독과점 기업의 갑질과 악덕 상술에 의한 소비자피해를 막아주는 파수꾼 역할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부 후배 학자, 운동가, 관료, 정치인들이 소비자가 약자가 아니라는 이상한 논리를 꺼내 들었다.

논리의 요지는 이제 21세기를 넘어서며 소비자주권 시대가 도래했고 스스로 똑똑해졌으니 소비자는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기업과 대등한 지위에 놓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비자보호법에서 보호라는 말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비자 보호 행정의 발전을 기대하며, 갑과 을의 동반성장과 상생을 염원한 선배들 생각과는 결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2007년 3월 28일 소비자보호법은 약자인 소비자를 보호한다는 법의 본질적 정체성을 뒤로하고 보호라는 단어를 없애고 말았다. 즉, 소비자보호법은 소비자기본법으로 전면 개정되었고, 소비자보호원도 보호라는 단어를 빼버렸다. 전면 개정에 일부 학자, 운동가, 관료, 정치인은 환호했고, 민원에 시달렸던 실무자들도 보호라는 단어의 무게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소비자는 지금도 계속되는 피해에 신음하고 있다. 소비자피해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사업자의 채무불이행이나 불법행위로 인한 1차 피해이고, 또 하나는 1차 피해로 야기된 손해를 보상받지 못해 입는 2차 피해이다. 전자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사업자 준수기준이 제정됐고, 후자의 피해를 보호하기 위해 구제기관이 설치됐다.

더 나아가, 1차 피해 예방을 위해 사업자 준수기준을 위반하는 기업에 대한 처벌 규정을 두었고, 2차 피해를 보호하기 위해 소비자 분쟁조정위원회 등 구제기관에 국가 예산을 지원했다. 그러나 끊이지 않고 계속 터지는 피해 뉴스와 주의보에 소비자 마음은 지쳐만 갔고, 점점 어려워지는 기업과의 소통에 피해자 가슴은 타들어 갔다.

이제 더는 소비자를 울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소비자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취약계층인 소비자에게 스스로 적폐를 청산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학자, 운동가, 관료, 정치인들이 도와주어야 한다. 더불어서 소비자가 법의 보호 대상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소비자 적폐가 빨리 청산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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