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염순 이사장

안중근 의사는 의병투쟁을 위해 북간도로 망명길에 오르며 말한다.
“우리는 단 한 번의 의거로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두 번, 세 번, 열 번, 백 번을 꺾으려 해도 꺾이지 않고 올해 안 되면 내년에 해보고 그것이 십 년 백 년이 걸려도 좋다. 우리가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아들 대에 가서 또 손자 대에까지 가더라도 기어이 대한민국의 독립권을 되찾고 그런 다음에야 그칠 것이다.”

아래의 글은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다.

장한 아들 보아라
의로운 일을 해냈다.
많은 이에게 용기를 주었다.
조국의 자랑이요. 겨레의 기쁨이 되었다.
너는 이제 죽을 것이다.
사형을 언도받으면 항소하지 마라.
네가 벌한 이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는 없는 법.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지 마라.
작은 의에 연연치 말고, 큰 뜻으로 죽음을 받아들여라.

성자 슈바이처는 대학생 시절인 21세에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오직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 결심을 필생의 소명으로 간직하고 살아갔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슈바이처는 여러 분야를 동시에 공부하며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음악 치료 분야를 공부해 박사 학위를 땄다. 그러던 어느 날 콩고에 대한 기사를 읽은 후 남은 생애를 선교에 바치려던 생각을 바꾸어 본격적인 의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우리가 이 나라 사람들을 전도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수많은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어.”
슈바이처는 가슴에 품고 있던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30세의 나이에 의과대학에 등록했다. 그것은 그가 그동안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운명적 결단이었다. 당시 그는 이미 유능한 신학 교수로서, 오르간 연주자로서, 오르간 제조 기술자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슈바이처는 한 유대인 역사가의 딸인 헬렌 브레슬라우와 사랑에 빠졌다. 그의 프러포즈는 참으로 독특했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의사가 되려고 하오. 나와 함께 정글에서 같이 늙어갈 수 있겠소?”
헬렌의 대답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그래서 당신을 도울 간호사가 되겠어요. 당신은 나를 놔두고는 갈 수 없어요.”
장장 9년간의 학업을 마친 후 졸업과 동시에 슈바이처는 부인과 남은 생을 봉사활동에 바치기 위해 아프리카의 램버린(Lambarene)으로 갔다. 많은 이들이 슈바이처의 꿈과 그 꿈을 실천한 노력에 영향을 받았고, 반세기가 지난 뒤 앨버트 슈바이처라는 이름은 영원한 전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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