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비자원=사진
한국소비자원=사진

[컨슈머포스트=정진규 기자] 소비자보호법 최초 시행일인 1982년 9월 13일에는 동법 제27조에 피해보상기구 설치 명령권이 명시되어 있었다. 즉, 주무부장관은 사업자가 소비자의 피해보상 처리를 위한 피해보상기구의 설치 운영을 촉진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일정 기준 이상의 사업자에게 피해보상기구의 설치 운영을 명령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에 위반한 법인 대표자나 개인사업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되 이를 병과할 수 있도록 하여 피해보상기구 설치 명령의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경제기획원장관이 위원장을 맡는 소비자보호위원회는 각부 장관이 피해보상기구 설치 명령권을 행사하는 경우 이에 대한 심의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피해보상기구 설치 명령권이 1999년 4월 6일 조용히 사라졌다. 이 때 개정 이유서에는 불필요한 규제의 폐지를 위하여 소비자피해보상기구 설치 감독규정 등을 삭제한다고 되어 있다. 이 당시 국회와 정부에서는 소비자피해보상기구 설치 명령권이 없어도 소비자피해보상기구를 설치하지 않을 기업이 없기 때문에 불필요한 규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국회와 정부의 커다란 착각이었다. 이후 기업들은 소비자피해보상기구를 조용히 없애기 시작했고, 지금은 대기업조차 소비자피해보상기구를 설치 운영하는 사례는 찾기 어렵다. 어느 순간부터 시장에서 기업이 설치한 소비자피해보상기구는 종적을 감추었고 콜센터는 전화받아주는 업체들에게 하청을 주어 권한 없는 안내창구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탁상 행정으로 인한 국민 권익 훼손의 전형적인 적폐 가운데 하나이다. 국회나 정부는 기업이 소비자피해보상기구도 없이 영업을 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보고 없앴던 것이다. 그러한 판단 때문에 소비자피해보상기구 설치를 위한 명령 규정이 불필요한 규제라고 보았고, 삭제하더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회와 정부의 잘못된 믿음과 전문성 부족으로 인하여 소비자들은 예상치 않은 재난을 당하고 말았다. 2000년 이후 소비자들은 소비자피해보상기구가 왜 사라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국회와 정부 때문인지는 알 지 못했다. 설마 국회와 정부에서 소비자피해보상기구 설치 명령권을 삭제하였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소비자는 그 원인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아직도 소비자기본법 제4조에 소비자의 보상을 받을 권리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기업이 소비자피해보상기구를 설치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러한 권리보장은 어려워졌고, 보상창구가 아닌 분쟁해결 행정시스템을 이용하거나 법원을 통한 소송시스템을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회와 정부는 조속히 기업의 소비자피해보상기구 설치 및 운영 실태를 조사해야 한다. 또 소비자피해보상기구 부재로 소비자피해가 얼마나 방치되고 있는지도 조사해야 한다. 국민에게 실태를 공표하고 빠른 시일 내에 제대로 된 소비자피해보상시스템으로 원상 복구시켜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엉뚱한 규제완화로 국민이 재난을 입지 않는 나라가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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