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살린 내 생명... 봉사는 내 운명

남편의 외조가 없었다면 봉사도 사업도 힘들었을 것

 

 

자수와 표구로 유명한 종로화랑(구 종로자수)의 대표이신데, 사업은 얼마나 하셨나요?

올해로 41년 째 이끌어오고 있습니다. 원래는 대형자수와 표구를 유명특급호텔과 대형웨딩, 정부산하연회 및 정부기관행사 등에 납품했는데, 최근에는 자수 대신 그림을 위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호도 종로자수에서 종로화랑으로 변경했지요. 병풍, 파티션, 배경자수와 그림, 장식물 등의 제품을 일괄적으로 제작하는 공정은 규모면에서 전국 최고라고 자부하고 있고요, 제품 하나하나를 용도에 맞추어 직접 디자인하고 원사염색, 손자수 표구 제작에 이르는 전 공정을 연계해서 고객의 취향에 맞는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사절단 방문 당시 우리정부에서 저희 화랑의 작품을 공식 증정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하늘이 살린 생명으로 타인을 위해 헌신하다

사업도 사업이지만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봉사를 시작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스물아홉 살 때인 1974년 9월, 10시간 대수술 끝에 1.9kg 사내아이를 낳고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장이 꼬이고 터져서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기도 했지요. 그렇게 100일 가까이 사경을 넘나들다가 마침내 퇴원하는 날, 산부인과 과장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제 의술로 살린 것이 아니라,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난 겁니다. 그러니 건강을 회복하면 평생 베풀면서 사세요.” 그리고 과장님은 노란 고무줄로 고무신과 제 발을 묶어주셨어요. 왜냐하면 체중 52kg으로 입원했던 제가 38kg으로 퇴원하게 돼서 고무신이 헐거웠거든요. 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던 저는 퇴원 후 과장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열심히 살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저는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천했어요. 통장, 반장, 동 직원, 우체부, 청소 아저씨 등 저희 집을 방문하는 사람에게 여름에는 냉수, 겨울에는 뜨거운 보리차로 마음을 담아 대접했지요. 저희 집에 오신 손님을 단 한 번도 빈 입으로 돌려보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동네에 소문이 나면서 1983년, 면목5동의 부녀회장이 됐습니다. 당시 구청장님이 걱정을 하셨어요. 부녀회장이 너무 어려서 일을 잘 할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사경을 헤매며 얻은 일생의 교훈은 절대 어리지 않았고 그때부터 저의 봉사인생은 시작됐습니다.

 

▲ 김귀옥 부회장이 사랑나눔행사에서 다문화가정주부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봉사활동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작은 아이를 업고 김포공항 연도에 나가 태극기를 흔들며 귀빈을 환영하기도 했고, 어느 해는 큰 수해가 나서 지원물자인 쌀과 옷감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어요. 임산부와 중풍환자, 응급환자에게 연락이 오면 집으로 병원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저희 집 식구들은 뒷전으로 미루며 동분서주했습니다. 1992년부터 13년 간 논현2동 어머니 방범위원장을 맡았는데,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일하시는 아줌마가 나오지 않아서 제가 직접 점심 저녁으로 침구청소 등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매년 겨울에는 회원들과 함께 김장 500포기를 담았고, 여름 복날에는 삼계탕을 해서 의경들에게 봉사했던 기억도 나네요. 또 동네에 수사본부가 차려졌을 때는 밤늦게까지 수고하는 경찰관들의 간식을 챙겨주며 힘들어하는 모습에 같이 가슴 아파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입학한 후부터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어머니 회장을 맞으면서 선생님의 노고와 수고에 감사하고 아이들을 격려하며 사심 없이, 열심히, 신나게 봉사했습니다. 아이들이 크고 제가 중년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아파트 부녀회장과 동 대표를 하면서 주민들을 위해 즐겁게 봉사했던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고아원이나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식사봉사를 하고, 천주교 복지시설에서 미약하나마 자원봉사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원복지재단과 희망나눔 밀알재단에도 후원하면서, 그 옛 날 병원 과장님의 말씀에 부끄럼 없이, 그리고 제 스스로 후회가 남지 않도록 뜻있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치에 입문할 뻔 하셨다고요. 지금도 정치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1995년 강남구의회 의원선거(논현2동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무소속으로 출마했음에도 꽤 많은 표를 얻어서 그 자체로 감사했고 또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정치는 제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지요. 제가 직접 나서기보다는 제가 정말 신뢰하는 분이 정치를 한다면 뒤에서 적극적으로 도울 뜻은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정치보다는 봉사가 더 적성에 더 맞거든요.

 

▲ 민주평통 강남구협의회 사회복지단원들과 함께

강남평통사회복지단 회장으로도 활동하고 계신데 어떤 단체인지 설명해 주세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산하 단체로서, 이름 그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하는 봉사단체입니다. 북한이탈주민이나 다문화 가정, 소외된 우리의 이웃을 위해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임이에요. 소외된 이웃의 문제는 너와 나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숙제입니다. 강남평통공동체에서는 이 숙제를 나눔과 동행, 실천과 감동으로 풀어나가고 있답니다. 복지단은 현재 22명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2013년 상반기에는 강남경찰서 관내 탈북 청소년을 지원했고 2014년 하반기에는 서초경찰서 관내 탈북 청소년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강남평통사회복지단은 더 많은 회원들과 함께 봉사라는 고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해 나갈 것입니다.

 

탈북 청소년은 통일대한민국의 큰 일꾼

 

탈북 청소년들을 위해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셨는지요.

지난 2013년, ‘북한이탈청소년 자신감 회복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세 차례에 걸쳐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첫 번째 행사는 9월 12일 반석학교 체육관에서 ‘추석맞이 민속놀이 한마당 윷놀이 제기차기 대회’로 열렸는데요, 탈북 아이들과 저희 복지단 회원들, 강남경찰서 보안과 직원분들 총 36명이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아이들에게 문화상품권을 선물하고 떡과 과일을 먹으며 윷놀이와 제기차기를 했더니 시간이 금방 지나가더군요.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기숙사로 떡, 음료수, 과일을 배달해 정을 나눴지요. 상처를 훈장처럼 달고 온 아이들이 짧은 시간이나마 북쪽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이웃의 정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두 번째 프로젝트는 11월 4일 ‘따뜻한 겨울나누기, 겨울 방한복 점퍼 지원’ 행사로 강남구민회관에서 치렀습니다. 제가 방한복 점퍼를 기증하고 회원들과 함께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방한복을 직접 입혀주었어요. 서로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모습들이 쌓이고 쌓이다보면 아이들의 마음에도 따뜻한 봄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에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행사는 ‘따뜻한 겨울나기, 방한용품 모자 목도리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12월 22일에 열렸는데, 저희 단원들이 직접 아이들 학교 기숙사를 방문해 방한용품들을 전달했답니다. 특별히 전경자 부회장님(전경자 컬렉션 대표)이 모자와 목도리를 기증해주셔서 더욱 뜻 깊었던 행사였지요. 아이들, 선생님들에게 따뜻한 차 대접을 받으며 대화를 나누고 온 덕분에 우리 회원들은 그 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습니다.

 

▲ 따뜻한 겨울나누기 행사에서 행사취지를 설명하고 있는 김귀옥 부회장

탈북청소년뿐만 아니라 탈북 엄마와 아기들을 위한 봉사도 하셨지요.

작년 9월 강남구민회관에서 탈북 가족 45명을 초청해 중고 유모차와 유아용품 기증식을 열었어요. 요즘에는 고가의 유모차까지 등장한데다 잠깐 쓰는 유아용품이라 살림이 어려운 탈북가정에겐 부담이 될 거라는 생각에 이재민 강남구의원을 비롯한 민주평통 강남구협의회 소속 여성자문의원들과 함께 기증운동을 기획하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행사 한 달 전부터 20여개 플래카드를 붙이고 5000장의 전단을 돌려 기증품들을 받았지요. 제가 살고 있는 타워팰리스 2차 입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사정을 설명했더니 고맙게도 총 68명이 동참해주셨답니다. 유모차 10대, 세발자전거 5대, 보행기와 변기 등 1톤 트럭 12대분, 일회용 기저귀와 유아복, 아동도서도 탈북자들이 마음껏 가져갈 수 있을 만큼 모았습니다. 민주평통 강남협의회장인 (주)블랙야크 강태선 회장님이 자사 아동의류 1000여점을 기부해 주셔서 행사가 더욱 빛이 났습니다. 중고품들이라 혹시라도 엄마들이 마음 상해할까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유모차는 걸레질과 기름칠은 기본이고 소독까지 했고요, 의류는 아동용 세제로 전문세탁을 한 뒤 다림질해서 비닐포장을 했습니다. 저희 집에서 보름동안 기증품 손질작업을 하느라 고생을 하긴 했지만, 힘겹게 안고 온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는 탈북 엄마들의 모습을 보면서 피로가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봉사의 힘이 아닐까요?

 

▲ 따뜻한 겨울나누기 단체촬영

탈북청소년들을 각별히 챙기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 힘든 일을 겪은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은 중국을 통해 남한으로 건너오기도 하지만, 라오스나 캄보디아, 몽골 등 매우 고된 길을 거쳐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믿지 못하지요. 사람을 믿지 못하니까 말수가 적습니다. 같은 기숙사 학생들에게도 쉽게 마음을 내주지 못하고, 같은 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몇 명하고만 대화를 나눈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자식들을 키워낸 부모이자 손주들의 할머니로서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고, 그 아이들이 남한 아이들처럼 행복하게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이해시키고 설득해서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앞으로 통일을 염두에 둬야하지 않습니까. 통일이 되면 탈북 청소년들이 반드시 큰 역할을 해주리라 믿기 때문에 저는 이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싶었습니다.

 

▲ 가족과 함께

봉사의 원동력은 가족의 사랑

 

봉사활동으로 식구들에게 소홀했다고 하셨는데, 자제분들은 어떤 일은 하시는지요.

다행히 아주 잘 자라주었습니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해서 현재 가천대 교수로 재직 중에 있고 며느리는 판사로 나라에 봉사하고 있지요. 딸은 전업주부로 남편 뒷바라지 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없습니다. 요즘에는 손주들 재롱보는 게 아주 큰 낙 중의 하나랍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저희 남편 덕이에요. 남편의 적극적인 외조와 사업에서의 성실함이 없었다면 저는 결코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남편과 아들 딸 며느리 손주들 모두 모두 자랑스럽고 사랑스럽습니다.

 

인생의 철학이나 좌우명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 개인적으로 ‘우리는 길 떠나는 인생’이라는 글귀를 좋아하고 또 그것에 맞춰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무거운 옷도, 화려한 명예의 옷도, 자랑스러운 고운 모습도 다 벗고 갈 텐데 왜 사람들은 서로를 더 위로하고 사랑해주지 못할까요? 어차피 저 인생의 언덕만 넘으면 헤어질 텐데 왜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상처 난 흔적만 훈장처럼 달고 가려할까요? 우리는 모두 길 떠나는 나그네들입니다. 이제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사랑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나누어야할 때입니다.

 

 

김귀옥 부회장 약력

 

1983~85면목5동 부녀회장

1985~88은석초등학교 어머니회장

1989~93언북중학교 어머니회장

1992~93영동고등학교 육성회장

1992~96 강남경찰서 어머니방범 연합회장

1992~2005강남경찰서 학동파출소 어머니방범위원장

1995~2002 강남 논현동 동현아파트 부녀회장

2003~2006 강남 도곡동 타워팰리스 2차 부녀회장

강남 도곡2동 주민자치 부위원장

2011~현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강남구협의회 여성부회장

2013~현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강남구협의회 사회복지단 회장

 

▲ 대통령표창 수상 후 기념촬영하고 있는 김귀옥 부회장

 

대통령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장/감사패 2회

서울경찰청장 표창장/감사패 2회

한미 친선 감사장 2회

강남구청장 표창장 5회

동대문구청장 표창장 1회

강남경찰서장 표창장/감사패 4회

강남교육지원청 교육장 표창장 1회

동부교육지원청 교육장 표창장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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